최근에 구로근로자복지센터를 방문한 후 콜센터 여성노동자의 노동경험을 연구한 S활동가와 '노동자의 미래'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L을 만났다. 그리고, 오늘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서울근로자건강센터를 방문해 센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오는 저녁 길은 매우 쌀쌀했다. 저녁 6시쯤 쏟아져 나오는 인파들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모두들 쌀쌀한 바람에 몸이 얼은 듯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지친 몸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 걸으면 너무 힘들고 외로운 이 길. 혼자 걷는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이 길. 그렇지만, 이렇게나 많은 군중들이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물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따뜻하게 눈인사를 건네지도 않지만, 함께 걸어가고 있기에 그렇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학교 대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던 학생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혼자가 아니기에 외롭지 않았던 그 시절. 지금 이곳에서 또 다시 연장이다.
인파를 헤치고 난 이전에 찾아두었던 L 정보통신 회사를 둘러보고자 발걸음을 퇴근하는 인파와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사람들의 기합소리가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인조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환한 조명 아래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주변에는 아파트형 공장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이런 빌딩 밀림 속에 이런 경기장이 있을 줄은 상상치 못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경기장 반대편에 걸려 있는 플랜카드에 눈길이 더 갔다.
"각종 근로기준법 위반 신고하세요!"
낮에 '노동자의 미래'에서 활동가를 만나 들었던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가 떠올랐다. 활동가 이야기에 의하면 아주 어렵게 전화를 한 노동자도 열에 일곱은 자신이 속한 회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절대 본인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도 우리가 모르는 회사의 압박에 대한 예기불안으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저 플랜카드는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축구를 하는 저들은 어딘가에 소속된 노동자일텐데. 하지만 시선은 플랜카드가 아닌 축구공에 가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이제 선택의 문제가 된 건 아닌지.
찾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전히 저녁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은 층들이 많았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흡연구역을 찾아냈다. 도로와 가까운 쪽이니 여성보다는 주로 남성들이 이용하는 흡연구역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에 놓인 두 개의 재떨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동그란 도너츠를 연상시키는 재떨이 사진은 이 곳의 흡연 정도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특히 외부에 노출된 흡연구역은 대부분 큰 재떨이가 있는 동시에 주로 남성흡연자들로 가득하다. 반면에, 여성흡연자는 실제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재떨이의 꽁초들이 말해주듯 수많은 남성들이 이곳에서 흡연의 사회적 유용성과 감정조절 및 휴식의 도구로서의 상징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었다.
처음 L정보통신을 찾아가고자 했던 것은 인터넷 구직광고에서 새로운 상담사를 뽑는 광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담사 지원자는 별관으로 오라고 안내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찾아가니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가는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풍경은 사실 주변 풍경과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한쪽 도로벽은 금발의 외국여성이 자신의 옷을 자신감 있게 보여주는 광고판이었다. 그런데, 그 바로 앞 도로에는 '소액전문대출'이라는 문구가 찍힌 명함형 광고지가 뿌려져 있었다. 묘한 대비가 되는 풍경들이었다. 즉,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사업장이 있더라도 노동자들은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고3이 마치 의무처럼 공부를 하듯, 이어가고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대출 빚 혹은 카드값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 느껴졌다. 그리고, 돈을 모으면, 말 그대로 꿈꾸던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는 미련에 투자한다.